아직 오지 않은 모든 것들에게

이창연 지음

I.


모든 것의 마지막에 모든 것의 시작이 선명해졌다.

그 때 선명해진 건 나의 숨결이었다.

다가오는 마지막을 기다리며 내가 생각한 건, 마지막이 오기 전에 내 숨결을 담아 당신에게 건네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마지막은 내게 도착하지 않았다. 의식을 되찾은 나는 그렇게 나의 숨결을 작업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있는 내 세계는 꽃밭이었다. 우리는 그 꽃밭에 있었던 것이었고, 나는 내 숨결로 우리의 풍경에 영원한 생동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내가 해야 할 유일한 행위라는 것을 당신께 말하고 싶었다.

내 보기에 바르지 않은 세상인 걸 알면서도 내가 살아야 하는, 살아 내려는 이유는 당신이었습니다. 그런 당신께 무언가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을 무언가. 그것을 당신께 바치고 싶었습니다.


나의 선물은 나의 숨결입니다.

이 숨결을 받아 주소서.

그대, 내 신의 선물이시여.

II.

 빌리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종이에 적힌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고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자, 종이를 접어 흰색 종이 봉투에 넣고 봉투를 자켓 왼쪽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책상의 서랍 안에서 3년 간 꺼내지 않았던 시계를 꺼내 들었다. 시계는 자동 기계식 시계였기에 시간은 1시 10분에 멈춰 있었다. 시계는 빌리의 손길이 닿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빌리는 시계의 시간을 조정하지 않은 채 왼쪽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오늘 그는 시간을 알 필요가 없다. 해가 뜨기 전에만 그 공원에 도착하면 된다. 공원까지는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하다. 지금 출발하면 아마 자정 넘어 공원에 도착할 것이다.

 빌리는 현관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 복도를 걸어 나갔다. 뒷편에서 현관문이 닫히며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빌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여느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빌리는 무엇인가를 여러 번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은 빌리가 소년이던 시절 집에 혼자 있을 때 들어온 강도가 빌리의 목에 들이댄 일자 드라이버의 촉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로 빌리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여러 차례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여러 차례 문고리를 당겼다 밀었다 한다든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면서 혹시나 주머니의 다른 물건이 실수로 바닥에 떨어지진 않았을까 땅바닥을 확인한다든지, 그런 습관들 말이다. 빌리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그런 행동들에 지쳐 있었다. 그런 류의 습관은 강박에 가깝다. 빌리 스스로도 그것이 강박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는 것, 그런 것이 강박이다. 하지만 오늘은 문이 잘 잠겼는지 문고리를 여러 번 밀고 당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빌리는 더 이상 지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지쳐서는 안 된다. 그 공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빌리는 자신의 구두가 바닥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고요하고 싶은 밤이었다. 지난 몇 년간 시달린 심장의 박동 소리, 지금도 가슴 깊숙 한 곳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히 시끄러웠다. 하지만 오늘 신어야 할 구두는 이 구두여야만 했다. 그리고 이 바지여야만 하고, 이 자켓이어야만 하며, 이 시계여야만 했다. 4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내려오며 빌리는 정말이지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뉴욕. 맨하탄. 어퍼 이스트. 자정이 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거리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 낮의 거리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잠 들지 않는 도시라 불리우는 이 곳에서 잠 들지 않으려 애써 취하려 한다. 마리화나를 피워 대는 사람들, 손등 위에 하얀 가루를 톡톡 뿌려 그것을 코에 빨아 들이는 사람들, 술에 취한 사람들, 모두가 비틀대고 있다. 비틀거리다 그들끼리 서로 부딪히고는 하지만 싸움은 없다. 서로가 취해 있다는 동질감으로 서로를 용서한다.

 바람 한 점 없었지만 1월의 밤은 역시 추웠다. 몸의 열을 올려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빌리는 공원에 가는 길에 자신이 운영하는 바(Bar)에 들르기로 했다. 아주 좁은 공간에 위스키 병들이 입구 맞은편 벽면 가득 위치하고, 아주 커다란 빨간 스피커 하나가 바 중앙에 놓여 있는 술집이다. 테이블은 없다. 빌리의 바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미 무언가에 취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더 취하게 할 무언가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 들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에 들러 위스키 한 잔으로 취함의 정도를 높이고, 다시 새로운 취할 거리를 찾아 가게를 떠난다.

 위스키 한 잔과 신청곡 하나. 이 바의 메뉴다. 위스키 이름과 신청곡 하나를 포스트잇에 적어 20달러 지폐 한장과 함께 바텐더에게 건네는 것. 이 바의 주문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빌리가 입구에 들어서자 동업자인 J가 바텐더 부스에서 빌리에게 눈짓 인사를 한다. J의 왼손에는 포스트잇 한장이 들려 있고, 오른손은 그 포스트잇에 적혀 있는 위스키를 술잔에 따르고 있었다. 술잔을 손님에게 건네고, 포스트잇에 적힌 노래를 노트북에서 찾기 시작했다. 빌리는 바텐더 부스 앞으로 걸어가 바텐더 부스 모서리에 걸려 있는 회중시계를 보았다. 12시 5분 즈음이었다. 빌리는 부스 앞에 놓인 포스트잇 뭉치에서 한 장을 떼어내, 옆에 놓여 있던 펜을 집어 들어 ‘메이커스 마크. 빌리 조엘, Honesty, 1979 (Maker’s Mark. Billy Joel, Honesty, 1979)’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20달러 지폐를 한 장 꺼내 포스트잇과 함께 바텐더 부스 위에 올려두었다. “어이 빌리, 오늘은 누구의 숨결을 담고 왔는가” 라고 J가 노트북에서 손을 떼면서 물었다.

 빌리의 본업은 아티스트다. 그의 작업은 의뢰자의 숨결을 추출하는 것이다. 의뢰자의 가슴에 기계 장치를 부착해 들숨과 날숨 간(間) 가슴 위치의 변화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의뢰자의 숨결을 데이터로 추출한다. 의뢰자는 자신의 숨결을 데이터의 형태로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으로 빌리에게 숨결 추출을 의뢰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은 남겨질 가족에게 자신의 숨결 데이터를 선물하며 그녀 혹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임을 증명했다. 연인들은 서로의 숨결을 서로에게 바치며 영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의뢰는 매일같이 들어왔고, 매일같이 들어 오는 의뢰비는 생활비로 충분했다.

 “오늘은 내 꺼.” 라고 대답한 빌리는 J가 따라준 위스키를 한모금 삼켰다. J는 빌리의 옷차림을 보고는, “오늘 뭐 좋은 데 라도 가는겨? 왜 이렇게 차려 입은겨?”라 물었다. “공원에 가려고.”라고 빌리가 대답했다. J는 빌리가 공원에 왜 가는지, 공원에 가는데 왜 그렇게 차려 입었는지, 그리고 이 늦은 시간에 공원을 왜 가는지 물으려 했지만, 빌리가 건넨 포스트잇에 적힌 신청곡을 보고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빌리와 J는 대학원 동창이다. 대학원에서 선후배로 만난 뒤 일 년간 같이 살았고, 4년 전 J가 결혼을 하면서 이사를 나갔다. 그리고 둘은 이 Bar를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J는 빌리가 신청곡으로 적은 곡명을 보고, 오늘은 빌리와 수다는 떨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J는 그 노래가 빌리가 공황 발작을 일으키면 약을 먹고 듣는 노래라는 것을 빌리와 같이 살기 시작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부터 알고 있었다. 30대의 빌리 조엘이 부르는 Honesty가 바 중앙의 커다랗고 빨간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빌리는 잔에 남은 위스키를 한 입에 넘기고는 J에게 방금 마신 위스키 한 병을 부탁했다. J는 메이커스 마크 한 병을 길다란 갈색 종이 봉투에 담아 빌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빌리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어 “고마워, 형.”이라 말하고는 술병이 담긴 봉투를 들고 스피커 앞으로 갔다. ‘진실함. 얼마나 외로운 단어인가. 모두가 진실되지 않은 세상에서(Honesty is such a lonely word. Everyone is so untrue)’로 시작하는 1절의 후렴구를 스피커 앞에 서 듣던 빌리는 후렴이 끝나자 뒤를 돌아 다시 거리로 나섰다.

 빌리는 공원을 향해 걸으며 갈색 봉투 입구에 살짝 튀어 나와 있는 메이커스 마크의 병마개를 ‘뜯어’ 내었다. 이 위스키는 병마개를 빨간 밀랍으로 덮어 위스키의 향을 보존한다. 그렇기에 이 술병의 병마개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손톱으로 밀랍에 흠을 내고, 밀랍을 뜯어 내야 한다. 빌리는 위스키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종이 봉투의 모서리가 얼굴에 닿아 간지러웠다. 빌리는 위스키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Bar에 들러 술을 가져오느라 공원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빌리는 온 몸에 천천히 퍼져가는 열기와 올라오는 취기를 느끼며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공원을 향했다.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 그리고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다. 그렇게 공원에 도착한 빌리는 공원 앞 경고 표지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표지판에는 큼지막하고 굵게, 빨간 글씨로 ‘자정 이후 공원 입장 금지’라 적혀 있었다. 

III.

 빌리는 감정의 기복이 없는 3년을 살아 왔다. 그 3년은 급격한 감정의 기복에 시달린 2년이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감정의 기복은 사라진 뒤 다시 돌아 오지 않았다. 빌리는 3년 간 어떠한 기쁨도, 슬픔도, 화도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 없어진다는 건 여러 면에서 편한 일이기는 했다.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어떠한 일에도 화내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빌리의 세계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 잔잔함 덕분에 빌리는 꾸준히 열심히 살아 올 수 있었다. 아티스트로서 작품들을 발표하고, 평단의 인정도 받는 남부럽지 않은 작가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없어지고 난 한동안은 자신의 잔잔하고도 남부럽지 않은 삶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감정의 빈 자리는 공허함으로 채워졌다. 남부럽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에 남들이 존재할 때에나 살아가는 데에 격려나 자부심이 되는 것이다. 빌리의 세계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리는 거울을 보다가 자신의 입꼬리가 내려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억지로 입의 근육을 움직여 입꼬리를 위로 들어 올려 보았지만 힘을 풀면 입꼬리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 입술 아래에 자리 잡았다. 몇 차례 같은 행동을 해봤지만, 입꼬리는 매번 아래로 내려갔다. 그 때 빌리는 죽기로 결심했다.

자살은 하기 싫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자살은 실패할 때에 영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가 급격한 감정의 기복에 시달리던 시기에, 정확히 말하면 전처가 빌리의 외도를 근거 없이 의심했던 여느 날들 중 한 밤에, 빌리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 밤의 빌리는 부엌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빌리는 자신을 지겹도록 의심하는 전처에게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궁리했다. 마침, 길다란 고기썰기용 가위가 입을 벌리고서 싱크대에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가위를 들어 가위의 입을 닫고 왼쪽 손목에 가위를 찔러 넣었다. 가위가 손목에서 빠져 나왔을 때, 잠깐의 몇 초간은 피가 나오지 않아 빌리는 의아해했다. 의심을 멈춰 달라는 부탁을 전처에게 자살로써 전하고자 했던 빌리였기 때문에 가위로 찔러도 나오지 않는 피는 빌리의 계획과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몇 초가 지나자, 가위가 만들어 놓은 틈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곧 2cm 가량 솟구치기 시작했다. 부엌 바닥에 작은 연못 모양으로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손목에서 솟구치는 피가 이미 바닥에 떨어져 굳어진 피 위에 덧칠을 하듯 층층히 쌓여 갔다. 그런데 어쩐지 빌리는 이 일로 죽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이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부엌 바닥의 피를 닦아 내야 하는 귀찮은 과정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자살은 하기 싫은 두 번째 이유는 빌리의 가족들이었다. 자살은 남은 가족들에게 평생의 상처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죽음에 잘못이 없다. 하지만 남겨진 자들은 자책하기 마련이다. 빌리는 가족들이 자책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타살이었다.

 빌리와 J가 대학원생일 때에 둘은 매일같이 밤 10시쯤 까지 학교 도서관에 머물렀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나와 맨하탄의 위스키 바들을 돌아 다녔다. 하루는 여느 날처럼 취한 채 새로운 바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큰 공원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원 앞에 써 있는 ‘자정 이후 공원 입장 금지’ 경고 표지판을 보고, 둘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빌리는 아마 늦은 밤이 되면 범죄자들이 공원에서 활개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J는 그 경고판이 ‘흡혈귀(Vampire)’ 때문이라고 했다. J는 유학생이 아니라 뉴욕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미국 시민권자여서 도시의 풍문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J는 “내가 어디선가 들었는데, 이 공원에 흡혈귀가 있대”라고 말했다. 빌리는 처음엔 J가 취해서 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J는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J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J는 말을 이어 나갔다. "흡혈귀랑 같이 이 공원을 나서면 다시는 공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빌리는 흡혈귀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다. J는 “흡혈귀를 만나면 사라져 버리니까 아무도 흡혈귀에 대해서 모르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은 사라진 누군가, 그 사람과 함께 부랑 생활을 했던 사람이 그 사라진 누군가와 흡혈귀가 함께 공원을 나가는 뒷모습을 봤대. 그 사람 말이 흡혈귀가 하얀 천 쪼가리를 들고 있었다고 하더라.”라고 대답했다. 빌리는 J가 그 때 해 준 ‘흡혈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 빌리는 흡혈귀에게 타살 당하기 위해 공원을 찾았다. 빌리는 자신이 꾸밀 수 있는 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치장하고 집 문턱을 넘었다. 전처와 처음 데이트한 날에 입었던 옷. 그 날 신었던 구두. 그리고 3년 만에 서랍에서 꺼낸 결혼 예물 시계. 그것들은 빌리가 가장 찬란히 빛났던 시대에 빌리와 함께 한 것들이었다. 빌리는 그것들의 화려함으로 흡혈귀를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빌리의 자켓 안주머니에는 유서가 담긴 봉투가 있다. 빌리의 화려함에 유혹된 흡혈귀는 그 화려함 속 우울은 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빌리는 공원에 들어가 한참을 걷는 동안 ‘그런데 어떻게 찾지 흡혈귀를? 단서는 하얀 천을 들고 다닌다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만 했다. 답답해진 빌리는 잠깐 멈춰 서서 고개를 꺾어 올려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흡혈귀는 어디 있을까. 흡혈귀가 진짜 흡혈귀일까, 아니면 그냥 아주 위험한 사람일까.’ 답답함이 쌓여갈수록 취기는 사라져갔다. 빌리는 브라운백의 위스키를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한참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빌리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공원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경찰들은 길을 따라 순찰을 돈다. 흡혈귀가 그 길에 있을 리 없다. 빌리는 방향을 틀어 길을 벗어나 50m 앞 즈음에 보이는 수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벗어나 잔디밭을 걷다보니,  이제껏 고요한 새벽 공원을 시끄럽혔던 빌리의 구두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의식이 청각에 닿자, 어디선가 탁탁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빌리는 그 소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걸어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탁탁탁 소리가 누군가 드럼통 안에 피워놓은 장작불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장작불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빌리는 장작불 앞으로 다가가 잠시 몸을 녹이며 브라운백 안의 위스키를 한 모금씩 마셨다. 위스키는 몸 속에서 열을 피우고, 장작불은 몸에 따뜻한 빛을 쬐어 주어서 빌리는 '참 좋다' 라고 생각했다. 그 때 누군가 빌리 몇 발자국 뒤에서 “그거 독인데.” 라고 말했다. 빌리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너무 놀라 방금 마신 버번 위스키의 옥수수향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같은 목소리로 “그거 독이야.” 라는 말이 빌리의 뒤에서 들려왔다. 빌리는 다시 한 모금 들이키고, “알아. 상관 없잖아.” 라고 일부러 건방지게 말했다. 건방짐은 싸움을 만들고, 싸움은 타살의 가능성을 높힌다. 목소리를 낸 사람을 보기 위해 위스키 병마개를 닫으며 뒤 돌리는 시선에서 빌리는 금발의 긴 머리를 묶은 노신사가 검은색 신발을 신고 있고, 슬림한 검정 바지와 검정 자켓을 입고 있음이 보았다. 노신사를 향해 걸어가는 작은 몇 걸음에서 노신사가 검은색 가죽 구두를 신고 있고, 검정 데님 바지와 검정 벨벳 자켓을 입고 있는 것이 빌리의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그의 왼쪽 팔꿈치 주변에 하얀 천이 얇게 둘러져 묶여 있음이 보였다. '흡혈귀다.' 빌리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을 뻔 했다.

“자네, 이 시간에 왜 여기 와 있는건가.” 노신사가 빌리에게 물었다. 빌리는 노신사, 아니 흡혈귀를 유혹하겠다는 마음으로 또다시 건방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야 남이사 아닙니까.” 흡혈귀는 "그럼 됐네. 조용하고 싶으니 어서 여기서 떠나 주게." 하고는 빌리의 앞을 지나쳐 장작불에 다가가 드럼통 주변에 놓여 있는 장작을 하나 집어들어 장작불 안에 집어넣었다. 원래 건방진 사람이 아닌 빌리는 거짓은 역시 원하는 결말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드럼통 근처로 걸어가  장작불을 사이에 두고 흡혈귀 앞에 섰다. 빌리는 다시 유혹을 시도했다. 누군가에게 흡혈귀에 대해 들었고, 마침 당신 팔꿈치의 흰 천을 보았다고. 당신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일부러 건방지게 말했다고 이번엔 사실 그대로 말했다. 흡혈귀는 고개를 뒤로 제끼면서 큰 소리로 하하하 한 번 웃고는 고개를 내리면서 말했다. "흡혈귀. 근사한 이름이지? 맞네, 내가 그 흡혈귀네." “절 데려가 주시겠습니까?”라고 빌리가 묻자, 흡혈귀는 “그럼 잠시 실례하겠네.” 대답하며 빌리의 왼팔을 잡아 올렸다. 그러고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한 뼘 정도 되는 막대기를 꺼내어 빌리의 왼손 엄지 손가락에 그 막대기를 갖다 대었다. 따끔한 느낌에 빌리는 “뭐하시는 겁니까?” 물었다. 흡혈귀는 아무 말 없이 막대기를 자켓 안에 다시 집어넣고는 자신의 왼팔에 묶여 있던 흰 천을 풀어 빌리의 왼손 엄지 손가락에 감쌌다. “기다리게, 잠시.” 빌리는 흡혈귀가 피를 내는 것은 이해가 됐지만, 지혈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흡혈귀의 말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마음에 들어야 타살될 수 있다.

5분쯤 지나 흡혈귀는 빌리의 엄지손가락에 세게 감긴 천을 풀어주었다. 빌리는 천이 풀리자마자 손가락을 확인했지만 찔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이 흡혈귀는 천에 물들은 빌리의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 흥미롭군” 이라고 말했다. 빌리는 흡혈귀가 피를 보기만 해도 그 맛을 아는건가 싶어, “맛있어 보이나요?” 라고 물었다. 흡혈귀는 이번에도 고개를 뒤로 제끼면서 크게 하하하 한번 웃고는 고개를 내리면서 말했다. “아니, 자네 피의 색깔이 흥미롭다는 말이었네.” 빌리는 흰 천에 묻은 자신의 피를 보면서 “그냥 피잖아요.” 라고 말했다. 흡혈귀는 “그냥 피? 이봐. 사람들의 피가 다 똑같을 것이라 생각하나? 보아하니 자네, 30대인 것 같은데, 30년 넘게 무엇을 먹어왔나. 그리고 어떤걸 느껴왔나. 자네의 뇌와 장기들이 그 독들을 그냥 흘려 내보냈을 것 같나?” 라고 말하고는 빌리의 왼 손에 들린 메이커스 마크 위스키가 담긴 브라운백을 가리키며 말을 다시 이어갔다. “자네가 마시는 저 위스키를 보게. 사람들이 다 같은 위스키를 마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자네의 피를 그렇게 그냥 피라고 불러도 좋네.”

빌리는 흡혈귀의 말을 듣고서 몸에 한 번 들어온 독들은 몸 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독들은 몸에 흐르는 피에도 스며 있을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빌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빌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흡혈귀는 제안을 던졌다. “자네, 나와 어디 가 보지 않겠나.” 빌리는 드디어 흡혈귀의 타겟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시지요.” 라고 바로 대답했고, 둘은 함께 공원 출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흡혈귀의 왼손에는 흰 천이 들려 있었고, 빌리의 오른손에는 위스키가 담긴 브라운 백이 들려 있었다.

IV.

 흡혈귀가 빌리를 데리고 간 곳은 공원 건너편의 직물 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자정이 훌쩍 넘은 이 시간에 직물 상점들의 불은 당연히 모두 꺼져 있었다. 흡혈귀는 한 상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 몸을 구부려 문 셔터 아래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흡혈귀가 셔터를 위로 올리자, 출입구 정면에 빨간 스티커로 붙여진 상점의 이름이 보였다. ‘천 개의 빨강(A Thousand Reds).’ 흡혈귀가 출입구 문을 밀고 문 옆에 설치된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상점의 내부가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빨간색인 직물 상점이었다. 바닥, 천장, 벽면, 상품 진열대, 카운터, 모든 것이 빨간색이었다. 그리고 직물 거리에 위치한 상점답게 양쪽 벽면에 위치한 상품 진열대에 빨간 천들이 길다란 봉처럼 돌돌 말려진 상태로 캐비넷 안에 질서 있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천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라벨에는 ‘1201’, ‘0826’, ‘0321’ 이렇게 네자리 숫자들이 도장으로 찍혀 있었다. 흡혈귀는 상점 안 쪽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어서 이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빌리는 양쪽 벽면 가득한 빨간 천들을 지나,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진 복도를 따라 사무실로 향했는데 마치 빨간 불빛의 터널 안을 운전하며 지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관리자 사무실은 온통 흰색이었다. 하얀 린넨 벽지와 하얀 린넨 커튼, 천장도 바닥도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안쪽 벽면에 놓인 하얀 책상 뒤 알루미늄 의자에 앉아 있는 흡혈귀가 보였다. 그의 책상 옆에는 병원에서 본 듯한 하얀 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상 바로 옆에는 회색 금속 재질의 스탠드가 있었고, 그 스탠드의 상단에는 스탠드와 같은 재질로 보이는 회색 금속 재질의 정육면체 기계 장치가 걸려 있었다. 빌리는 그것이 헌혈 버스에서 본 채혈 장치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흡혈귀는 사무실에 들어온 빌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난 자네의 피를 원하네. 흡혈귀가 피를 달라하면 무서울 테니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나는 직물상인이네. 아까 봤다시피 오직 빨간 직물만 취급하지. 자네, 아티스트나 디자이너들이 같은 색깔 물감 하나 고르는 데에도 이 빨간색 저 빨간색 한참을 고민하는 것을 아는가. 그들에게 ‘빨간색’은 없다네. 그들은 우리가 쓰는 ‘짙은 빨강’, ‘어두운 빨강’, ‘밝은 빨강’, ‘무거운 빨강’, ‘가벼운 빨강’, 이런 단어들도 사용하지 않지. 그들에게 색깔은 말로 구분되지 않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이야.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주 다양한 빨간색을 제공하지.” 빌리는 자신이 아티스트인 것을 말하지 않고, 흡혈귀가 말을 이어 가도록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처음엔 빨간색 염료에 다른 색 염료를 살짝 섞는 방식으로 새로운 빨간색들을 만들어서 팔았지만, 그들은 금세 질려하더군. 나는 그들처럼 예민하지 않거든. 그래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지. 나는 사람들의 피 색깔이 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내 피와 내 아내의 피를 채혈해서 흰 천에 물들여 보았지. 다른 빨간색이 나오더군. 아내의 피와 내 피를 흰 천에 물들여 진열대에 놓았더니 아티스트들이 환장하듯이 사가더라니까.” 그제서야 빌리는 이 자가 ‘흡혈귀(Vampire)’가 아니라 공원에서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와 피를 채혈하고, 그 피로 직물을 염색해 판매하는 상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괴하지만 빌리가 찾던 '위험한’ 사람은 아니었다. 빌리는 오늘 밤 타살 당하지 못한다는 데에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일 다시 시도하면 된다. 빌리는 궁금증이나 해소하자는 마음으로 흡혈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과 공원을 나선 사람들은 공원에서 다시 보이지 않는거죠?” 흡혈귀는 으스대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공원에 떠도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부랑자일 걸세. 흥미롭다 여겨져 내가 말을 건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부랑자였거든. 부랑자들은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지. 회사에서 해고되는 바람에, 아니면 누군가에게 상처 받았다든가. 어떤 시스템에 의지하거나 어떤 사람에게 의지하던 사람이 그들에게 버림 받고 나서 부랑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자네는 알고 있었나. 나는 그들에게 사연을 물어보고 내가 듣지 못했던 새로운 사연이 있는 자에게 제안을 한다네. 내게 피를 주면, 나는 그들에게 돈을 주겠다는 제안. 나는 그 대가를 후하게 쳐준다네. 부랑자들이 좋은 양복을 하나 사 입고, 일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 만큼의 돈. 그러면 그들은 늦은 밤 공원에 다시 나타날 수가 없지. 내일 출근해야 하거든.”

흡혈귀는 오른손 검지를 뻗어 빌리에게 향하며 말했다. “가끔 자네같이 부랑자가 아닌 사람들도 있어. 부랑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사연이 있느냐 없느냐가 피의 색을 결정하는 거야.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자네처럼 독들을 먹어대거든. 그리고 그 독은 피의 색을 변화시키지. 세상에 없던 그들만의 빨간색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야. 흥미로운 건 사연이 기가 막힐 만큼 답답할수록 그 사람의 피로 물들인 천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는 거야. 독버섯이나 독사의 화려하고 선명한 색깔을 생각해 보게. 내 말이 이해가 될 것이야.”

흡혈귀는 이제 자신의 옆에 있는 채혈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오늘은 자네의 피를 사려고 하네. 자네의 사연은 묻지 않겠어. 이 ‘흡혈귀’를 찾아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네 안에 독이 충분히 쌓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거든. 아, 자네는 부랑자는 아닌 것 같으니 양복 살 돈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자네 피에 대한 대가도 다른 피들과 똑같이 후하게 치러 줄게.” 흡혈귀는 사무실 벽면의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야겠다 싶었는지 “자, 내 제안을 받아 들일텐가.” 라고 빌리에게 물었다. 빌리 역시 ‘당신의 피 색깔은 다른 사람들의 피 색깔과 다르다’는 흡혈귀의 궤변같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에 자신의 피 색깔이 보고 싶어지던 참이었다. “그러시지요”라고 빌리가 답했고, 흡혈귀는 그럼 자기 옆의 침상에 누우라 하였다. 빌리는 잠자코 자켓을 벗고 침상에 누웠다. 흡혈귀의 채혈 과정은 헌혈 버스에서 채혈하는 과정과 똑같았다. 심지어 피를 담는 흰색 반투명의 봉지 역시 한국의 헌혈 버스에서 본 봉지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이 곳은 미국이 아닌가. 같은 봉지를 쓰네?’ 라고 생각하던 빌리는, 따끔거리는 느낌에 주사 바늘이 왼쪽 팔꿈치 안쪽에 꽂혔다는 걸 알았지만 주사바늘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자신의 피가 빠져 나가는 느낌에 집중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흡혈귀의 채혈은 40분 정도 진행되었고, 그 사이 빌리는 잠깐 잠이 들었다. 흡혈귀는 주사 바늘을 빌리의 왼팔에서 빼내며 알코올 솜을 주사 바늘이 들어갔던 곳에 대었는데, 그 차가움이 빌리를 잠에서 깨어냈다. 빌리는 흡혈귀가 알코올 솜을 테이프로 고정시키는 걸 바라보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시선을 채혈 봉지로 향했다. 500ml의 봉지에 빌리의 피가 담겨 있었다. 봉지의 아래 부분이 크게 부풀어 있었고, 그 안에 담긴 피는 500ml의 물과는 다른 묵직함이 있었다. 흡혈귀는 테이프로 알코올 솜을 고정시키는 걸 마치자마자 알루미늄 의자에서 일어나 스탠드 고리에 걸려 있던 채혈 봉지를 빼 내고는 빌리에게 말했다. “준비되면 사무실 바깥으로 나오게.” 빌리는 곧장 일어나 사무실 바깥으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온통 빨간 인테리어와 빨간색 천들로 가득찬 상점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빌리는 강한 현기증이 느껴져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머리 안 쪽 가득히 전기에 감전된 듯한 강렬한 저림이 느껴졌고, 온통 빨간색으로 채워진 상점에서 사물의 경계가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태양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붉은 시야와 비슷했다. 잠시 뒤 머릿 속 저림이 어떤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감각은 카타르시스와 같이 느껴졌다. 

그 사이 흡혈귀는 상점 카운터 뒤에서 채혈 봉지 상단 모서리 한쪽을 가위로 작게 잘라내고 검은색 염료 통 안에 빌리의 피를 부어 넣기 시작했다. 한 방울도 봉지에 남기지 않겠다는 듯 봉지를 톡톡톡 털면서. 빌리의 피를 염료 통에 모두 부어넣은 흡혈귀는 통을 뚜껑으로 닫고, 허리를 숙여 카운터 밑에 돌돌 말려 있던 흰 색 천과 그 옆에 놓여 있던 가로-세로 1m, 높이 10cm 정도 되보이는 투명 아크릴 틀을 꺼냈다. 현기증에서 벗어난 빌리는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피가 담긴 통 앞으로 왔지만 검은색 통 안의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흡혈귀는 투명한 틀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고, 돌돌 말린 흰 천을 그 틀 안에 반듯하게 펴내어 가운데 위치시켰다. 그러고는 빌리의 피가 담긴 염료 통의 뚜껑을 열어, 틀의 상단 우측 모서리에 천천히, 하지만 끊김없이 붓기 시작했다. 틀의 바닥면에는 살짝의 경사가 있어서 흰 천은 상단 우측 모서리부터 빌리의 피에 물들기 시작해, 흡혈귀가 염료 통의 피를 다 부어내기 전에 이미 흰 천은 빨간색 천이 되어 있었다. 통 안의 피를 남김없이 붓자 천 위에 1mm도 안될 법한 피의 막이 형성되었다. 피의 막은 천의 내부로 스며들면서 점점 얇아져 갔다. 그리고 이내 팔레트 위 마른 물감처럼 얕아졌다.

빌리는 틀 안의 흰색 천이 자신의 피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빌리의 피는 분명 빨간색이었다. 그러나 빌리가 기억하고 있는 3년 전의 자신의 피, 부엌 바닥에 연못처럼 고여 있던 그 피의 빨간색과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지금 빌리가 바라보고 있는 빨간색은 그의 기억 속의 빨간색보다 채도가 선명했고, 어두움이 적어졌고, 빛을 더 많이 반사시키고 있었다. 물론 조명의 탓 일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했다. 빌리는 고개를 들어 주변에 가득한, 다른 이들의 피로 물들인 천들을 둘러보았다. 상점에 들어서면서, 그리고 채혈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보았던 천들의 빨간색이 이제는 수없이 다채로운 색깔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색이 약간 섞여 보랏빛이 살짝 들어간 천도 있었고, 빨강보다 검정이 더 섞여 보이는 천, 바닥에 발려 있는 빨간색 페인트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천도 보였다. 그제서야 빌리는 흡혈귀의 ‘모든 사람의 피는 다 다르다’는 궤변같은 말이 사실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피로 물들인 천을 내려다봤다. 진열대의 천들과 분명히 다른 빨간색이었다. 빌리는 자신의 피에 어떤 독의 색깔이 섞였을까 라고 생각했다. 신경 안정제의 주황색, 공황발작 진정제의 하늘색, 메이커스 마크 위스키의 짙은 갈색, 초등학생 때 영화 속 주인공이 담배 피는 모습이 멋져 보여 화장실에서 신문지를 돌돌 말아 불을 붙여 피워 본 신문지 담배의 검정에 가까운 회색 연기, 그리고 정말 사랑했던 그녀의 새빨간 거짓말. 빌리의 전처. 빌리를 극도로 분노하게 하고, 또 지독히도 우울하게 했던 사람. 그리고 친구로 지내자는 문자 메시지로 빌리의 감정을 사라지게 한 사람. 빌리는 그녀의 거짓말 역시, 그녀가 살면서 거쳐온 독들의 색이 만들어낸 그녀만의 빨간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흡혈귀는 빌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 때까지 가만히, 빌리가 상점 입구 쪽 테이블 위에 놓아둔 브라운 백 속에 있는 위스키 병의 빨간색 마개를 열고 닫으며 한 입씩 마시고 있었다.

“제가 이걸 사가도 되겠습니까?” 빌리는 침묵에서 깨어 나와 흡혈귀에게 물었다. 흡혈귀는 “음, 그거 꽤 비싸게 파는데 말이야. 자네 같은 젊은이가 사기에는 비싼 값이야.”라고 대답했다. 빌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풀면서 흡혈귀에게 건넸다. “이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흡혈귀는 시계알을 보자마자 그것이 결혼 예물 시계임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물 시계로 이 시계를 선택한다. 흡혈귀는 고개를 뒤로 제끼면서 허허허 웃더니, 고개를 내리며 “이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거지.” 라고 말하며 다시 빌리에게 시계를 쥐어 주었다. 빌리는 “괜찮습니다. 제가 원합니다.” 라고 말하며 테이블 위에 시계를 내려놓았다. 흡혈귀는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뭐, 자네가 원한다면야. 사양하지 않겠네. 나는 비즈니스맨이니까.” 라면서 시계를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흡혈귀는 염색 틀에서 빌리의 피로 물들은 천의 모서리를 핀셋으로 집어 천을 꺼내 올렸다. 그 사이 빳빳하게 마른 빌리의 천을 투명 사각 봉지에 집어 넣은 다음, 길고 동그랗게 말아 흰색 원통형 상자에 집어 넣었다. “아, 나는 매출 정산을 위해 천에다 고유번호를 매긴다네. 번호는 내가 아니라 자네 같이 내게 피를 준 사람들이 정하지. 4자리 숫자로 정해 주게나.” 빌리는 전처와 이혼한 날짜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겨울 끝자락이었다는 것 밖에는. “오늘이 몇일이죠?”라고 빌리가 흡혈귀에게 물었다. 흡혈귀는 “1월 9일. 아니다, 자정이 넘었으니 1월 10일이 되었구만.” “0110”으로 해주시죠.” 라고 빌리가 말했다. 흡혈귀는 카운터 서랍에서 숫자 회전 도장을 꺼내어 숫자를 ‘0110’으로 맞춘 뒤, 원통형 상자 뚜껑에 도장을 힘껏 찍었다. 그러고는 빌리에게 상자를 건냈다. 상자의 뚜껑에 ‘0110’ 숫자가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빌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말했고, 흡혈귀는 “그러게나. 곧 해가 뜰 시간이니 나는 이제 자러 가야겠어.”라 답했다. 빌리는 오른손으로 천이 담긴 상자를 들고, 왼 손으로 위스키 병이 담긴 브라운 백을 들고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택시를 잡았다. “343 이스트 81 스트리트로 가주세요.”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빌리는 머리를 창문에 기댔다. 그리고 브라운백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그러나 병은 비어 있었다. 흡혈귀가 다 마셔 버린 모양이다. 빌리는 택시 기사에게 ‘306 이스트 81 스트리트’로 목적지를 변경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빌리는 눈을 감고, 잠깐 잠에 들었다.

V.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눈을 뜬 빌리는 택시비를 계산하고, 바에 들어갔다. 손님은 없었고, 바텐더인 J는 하품을 하면서 빌리를 맞이했다. “어이 빌리.” 빌리는 ”어, 형”이라 대답하면서 바텐더 부스 모서리에 걸려있는 회중시계를 보았다. 5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빌리는 부스 앞에 놓인 그새 얇아진 포스트잇 뭉치에서 한장 떼어 내어 ‘메이커스 마크. 빌리 조엘, Honesty, 2014 라이브(Maker’s Mark. Billy Joel, Honesty, 2014 Live)’ 라 적고 20달러와 함께 J에게 건넸다. J는 곧장 메이커스 마크 위스키 한 잔을 따라 빌리에게 건네고, 노트북에서 노래를 찾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바 가운데 위치한 빨갛고 커다란 스피커에서 60대의 빌리 조엘이 부르는 30대의 빌리 조엘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빌리는 위스키 잔을 들어 ‘당신에게 건배, 빌리(Cheers to you, Billy)라고 말하고 잔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은 빌리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 안에 담긴 유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유서를 다시 봉투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포스트잇 뭉치 옆에 놓인 펜을 집어들어 유서가 담긴 봉투 위에 글씨를 적었다. 


아직 오지 않은 모든 것들에게.’


 J가 바텐더 부스 뒷켠에 수북히 쌓인 20달러 지폐 뭉치를 한장 한장 세면서 물었다. “편지여?” 빌리는 대답했다. “아니, 시(詩).”



-끝-